영화 <피아니스트>(로만 폴란스키, 2002.)는 충돌한 두 이데올로기가 폭발한 전쟁 통 속에서도 예술만은 그 모든 것을 넘어설 수 있다고 말해주는 수작이다. 극중 주인공 스필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게 가족과 지인들을 모두 잃고 폐허가 된 마을에 숨어 겨우 목숨을 부지하던 유태인 피아니스트. 뜯어 먹으려던 버려진 통조림이 하필 독일군 장교 발밑으로 굴러가면서 이 기구한 피아니스트는 곧 죽을 운명에 놓인다. 동사무소 직원처럼 이것저것 신상을 물어보던 장교는 전직 피아니스트였다는 스필만의 고백에 그에게 피아노 연주를 지시한다. 그리고 스필만이 연주한 ‘쇼팽 발라드 1번 G마이너’는 장교를 보편적 인류애로 이끈다. 장교는 자신과 스필만의 운명이 역전되기 전까지, 스필만이 숨어든 거처를 오가며 먹을 것을 전해주며 전시 상황을 알려주는 사랑을 보여준다.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다.

2019년 제15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공식 포스터

안타깝게도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스스로 작품의 아우라를 흐리고 말았지만, 우리는 <피아니스트>가 아니더라도 예술이 국가와 민족,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정서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공동경비구역 JSA>(박찬욱, 2000.)에서 남북한 군인이 함께 듣던 故 김광석 ‘이등병의 편지’, <메리 크리스마스>(크리스찬 카리온, 2005.)에서 단 하루의 휴전을 이루어낸 영국군과 독일군이 함께 부른 캐롤, 그리고.

영화 ‘피아니스트’ 스틸컷

일본 영화 7편을 초청해 상영한다며 제천시의회가 제천국제음악영화제를 비판한 상영 반대 성명은 2015년 <다이빙 벨> 논란의 축소판이다. 영화제에 시 예산을 투입했으니, 초청작도 시의회 입맛대로 고를 수 있다는 발상이 꼭 5년 전 부산국제영화제를 생각나게 한다. 무엇보다 올림픽에서 정치적 구호가 금지인 줄은 알면서, 영화제에는 ‘NO JAPAN’ 구호를 들고 들어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싶다. 이 와중에 일본이 자국 미술 전시회에서 우리 소녀상을 전시에서 뺐다고 하는데 제 살 깎아 먹기다. 일본이 성취했다고 자랑하는 문화라는 게 어느 수준에 있는지 보여준다. 문제는 우리다. “싸우면 똑같은 놈 된다”는 선조들 말씀이 이럴 때 딱 맞다. 특히 예술을 포함한 문화계에 있어서만큼은, 정치적 구호를 배제한 뒤 특수성을 인정하고 서로 교류하는 게 좋다. 그래도 제천국제음악영화제가 일본 영화 초청작들을 그냥 상영하기로 했다고 하니 불행 중 다행이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개봉해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좋더라도 좋다고 말할 수 없는 홍길동 같은 대중영화가 한 편 있다. 원신연 감독이 연출한 <봉오동 전투>(원신연) 말이다. 잘해야 8월 15일 광복절 특수 정도를 노려볼 만하다며 개봉한 영화일 텐데. 느닷없이 거센 일풍(日風)을 만나는 바람에 어쩌면 대박 조짐도 보인다고는 하지만, 대놓고 신바람을 불기에는 참 부담스럽게 됐다.

■ 다시 만난 류준열과 유해진

영화 ‘택시운전사’ 포스터

류준열과 유해진은 2017년 영화 <택시운전사>(장훈)를 통해 한차례 같이 작품을 한 바 있다. 극중 대학가요제 출전을 꿈꾸는 순수한 대학생 재식이가 류준열이었고 의기 넘치는 광주 지역 택시 운전사 황 기사가 유해진이었는데, <봉오동 전투>를 보다 보면 이상하게 <택시운전사>가 떠오른다. 주연 배우로 두 배우가 함께 출연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택시운전사>는 사건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인 독일인 파견 기자 故 위르겐 힌츠페터의 행적과 동시에 개인들의 희생을 함께 조명하는 작품이다. 언성 히어로(unsung hero), 불의에 굴복하지 않고 싸웠던 당시 모든 피해자를 장훈 감독은 그의 작품 속에서 유해진과 류준열 등으로 치환했었다.

<봉오동 전투>는 <택시운전사>와 비슷한 결을 유지하면서도 좀 더 의도가 선명하다. 원신연 감독은 <봉오동 전투>를 기껏 홍범도 장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독립군을 이끌고 거둔 첫 승리 정도로만 기억하는 후대를 부끄럽게 만들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류준열과 유해진이 또다시 소리 없는 영웅을 맡았다. 그리고 그와 함께하는 무수히 많은 소리 없는 영웅들이 있다. 그들 앞에 일일이 대문짝만한 자막으로 이름을 새겨주는 영화가 <봉오동 전투>다.

■ 선명한 한계, 독립군 처절함 어디로

분명 의미 있는 작품이지만 <봉오동 전투>는 한계가 너무 명확하다. 영화는 민족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한 평범한 시각으로 전투를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전쟁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인권 문제에는 일본군 소년군을 통해서만 겨우 어설프게 접근할 수밖에 없다. 보편적 인류애보다 민족적 특수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영화 ‘봉오동 전투’ 스틸컷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영화 <남영동 1985>(정지영, 2012)은 피로 얼룩진 80년대 독재 정권에 맞서 싸웠던 민주화 운동가들을 주목한 영화로 충분히 의미 있는 작품이지만, 당시 민주화 운동가를 고문하던 대공분실의 잔인함을 지나치게 묘사했다는 지적도 동시에 받았다. 얼굴을 물에 처박고, 전기를 온몸에 통하게 하고, 고춧가루를 물에 풀어 코에 들이붓는 장면이 고스란히 노출됐다. 하지만 고문관의 잔인함을 강조한다고 당시 민주화 운동가들의 처절함이 같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다. 둘은 붙어 있는 것 같아도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봉오동 전투>도 마찬가지다. 무고한 조선 백성에 일본군이 총을 쏴대고, 산 채로 호랑이 가죽을 벗겨낸다고 독립군이 처절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정작 독립군 캐릭터들이 가진 무게감은 오히려 결정적인 순간마다 유머와 위트로 덜어내어 버렸다. 뛰고 또 뛰는 전투 장면에서만 독립군들의 희생이 조금 전해질까 말까 했다. 하지만 일본군 묘사에 있어서만큼 영화는 첫 장면부터 포악함과 잔인함을 징그럽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니 ‘평화’나 ‘인권’이라는 큰 담론에는 닿지도 못하고, 우리 땅을 지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것마저 조금 아슬아슬했다. 아쉽다. 무게 중심 조절이 잘못됐다고 본다.

■ 유골함을 깨뜨린 일본군

그 와중에 일본군은 독립군이 전투 중에서도 사수하려던 유골함을 깨뜨린다. 하얀 유골이 땅에 떨어지고, 유골을 흙 속에서 급하게 가려내며 다시 주워 담던 유해진은 분을 참지 못하고 일본군과 정면으로 맞선다. 일본군을 유인하기 위해 도망 아닌 도망을 치던 중이었지만 유해진은 도저히 분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총을 들었지만, 유해진이 휘두르는 칼에 일본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칼이 총을 대적하는 건 실제로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지만 이 장면 속에는 특별한 의도가 엿보인다. 다시는 이 땅을 일본에게 내주지 않겠다는 결의를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문학으로 치면 ‘시적 허용’이다.

영화 ‘봉오동 전투’ 포스터

유골함에는 3.1 운동 당시 일본 경찰에게 끌려가 목숨을 희생당한 분들이 봉안돼 있었다. 말하자면 유골함은 그 자체로 일제에 맞섰던 민족혼이다. 그런데 그 유골함이 다시 일제에 의해 깨져버린 것이다. 가해자가 피해자 무덤을 파고 관을 깼다니 참 기막히지 않은가. 극심한 분노 조절 장애를 유발하는 장면을 연출한 의도는 선명하다. 극중 유골함을 깬 일본군은 지금 한일 양국 대립 구도를 만든 일본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잘못된 과거를 통째로 부인하는 현실 일본 그 자체로 볼 수 있다. 이를 눈치챈 관객은 영화가 주는 긴장감과 몰입에서 깨어나 장탄식을 내뱉게 되는 것이다. 독립군이 언덕에 올라 흙모래 섞인 유골 속에서 태극기를 꺼내 바람에 날린다. 태극기에서 떨어진 분이 하얗게 흩어진다. 유골함이 또다시 깨지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하면서.

신동욱 / 영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