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개봉을 앞둔 영화 <나랏말싸미>(조철현)를 포함해 배우 송강호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두 명의 왕과 한 명의 대통령을 연기했다. 그의 연기력을 이야기하는 건 너무나 새삼스러워서 어떤 말을 하더라도 사실은 결국 ‘송강호가 송강호 했다’는 말이랑 같다. 하지만 그로서도 한 시대를 이끌었던 소위 지도자를 연기하기가 쉬운 결정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90년대 중반부터 영화배우를 시작하고도 20년 가까이 단 한 번도 왕이나 대통령을 연기하지 않았다. <반칙왕>(김지운, 2000)과 <마약왕>(우민호, 2017)이 차라리 뭐, 왕이라면 왕이지만.

영화 <변호인> 스틸컷

송강호가 국가 지도자를 처음 연기한 작품은 <변호인>(양우석, 2013)이다. <변호인>은 1981년 공안 사건으로 유명한 이른바 ‘부림사건’을 다룬 영화인데, 알려진바 이때 피고인 측 변호인은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송강호는 처음엔 캐스팅 제의를 거절했다. “이 영화는 돌아가신 ‘그분’을 모티브로 제작한 작품인데, ‘그분’ 인생의 단면을 자신 있게 표현할 수 있을까 싶어 겁이 났다.” 폭과 깊이를 갖춘 배우 중에서도 손꼽히는 송강호지만 지도자를 연기한다는 부담감이 컸던 모양이다. 하지만 뒷이야기는 우리가 아는 대로다. 송강호는 시나리오에 끌려 극중 송우석 역을 맡아 빛나는 롱테이크(화면 전환 없이 길게 촬영해 보여주는 영화 문법) 변론 연기를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친근한 외모(?)와 특유의 능청스러운 연기, 그리고 거침없는 직설 화법 등이 정말로 ‘그분’을 생각나게 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정말로 80년대 공안 사건 피해자처럼 돼버려 소위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랐던 뒤따른 불운을 차치하고서라도, 송강호는 <변호인>을 통해 연기 인생에 새로운 분기점을 만들었다. 비교적 근작에 속하는 영화 <택시운전사> 속 김만섭은 <변호인>의 송우섭이 그만 변호사를 때려치우고 8년 동안 몰래 택시를 운전하기 위해 개명을 했을 뿐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서로 닮아있다. 그뿐만 아니다. 송강호는 <변호인> 이후 시대물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도>(이준익, 2014), <밀정>(김지운, 2016), <택시운전사>(장훈, 2017)와 <마약왕>(우민호, 2017) 등이 모두 <변호인> 뒤에 나온 작품들이다. <변호인>을 통해 연기 지평을 스스로 한층 더 넓힌 것이다.

■ 지도자? 진짜 데뷔는 <사도>에서

하지만 <변호인> 속 송우석은 어디까지나 변호사였다. 그런 점에서 보면, 송강호가 국가 지도자를 제대로 소화한 영화는 <변호인>보다는 <사도>라고 보는 편이 좋겠다. 송강호는 이 영화에서 전과는 확연히 다른 연기 톤을 보여준다. 조선 제21대 왕 영조는 복잡한 가계도 속에서 왕이 된 후 당쟁의 그늘에서도 탕평책을 펴는 등 왕권 강화를 위해 생을 바친 인물로 평가받는다. 동시에 늦은 나이에 얻은 세자를 갈등 끝에 뒤주에 가두고 말았던 모진 아버지이기도 했으니, 많은 사람의 기대와 달리 송강호의 영조에게 코믹 연기와 애드리브가 개입될 여지는 애초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말로 하자면, 송강호가 그동안과 다른 연기를 보여주기에 적절한 영화가 <사도>이기도 했다. 송강호는 변신을 택했다.

영화 <사도> 스틸컷

<사도>의 흥행 면에서만 보자면 이 선택은 득보다 실이 많았다. 관객들은 영화 속 인물에게 자신이 보고 싶은 모습을 투영하는데, ‘송강호의 영조’는 이 기대감을 일정 부분 배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송강호의 영조를 보며, 말하자면 머리를 묶고 나온 전지현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고정된 이미지는 사실 배우에게는 양날의 검이나 다름없는데, 시대가 전통적 성별관에 변화를 요구하기도 했거니와 전지현 스스로도 이미지에 갇히는 게 걱정이었던 것 같다. 전지현은 2012년 영화 <베를린>(류승완)에서 머리를 그냥 묶어버리고는 <암살>(최동훈, 2015)에서도 보란 듯 다시 머리를 묶고 나왔다. 처음엔 낯설어했던 관객들도 그 머리 모양처럼 신속하게 묶였고 <암살>은 크게 흥행했다.

같은 맥락에서, <광해, 왕이 된 남자>보다 흥행 속도가 빨랐던 <사도>는 롱런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 송강호는 <나랏말싸미>를 통해 두 번째 왕 연기를 선보인다. 용포를 입고 신하들을 내려다보는 권위적인 송강호가 이제는 낯설지 않다.

■ <나랏말싸미>는 어떨까

영화 <나랏말싸미> 스틸컷

<나랏말싸미>의 세종대왕 연기는, 황금종려상에 빛나는 배우 송강호의 필모그래피 한복판에서, 그리고 <사도>와 <변호인> 정도 사이에서 균형점이 느껴진다. 언뜻 정통 사극이라는 점에서 <사도>를 가깝게 느낄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치권이 서로 반목하고 반일 감정이 고조된 시국 위에 분명히 놓여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관객들은 ‘송강호의 세종대왕’에서 <사도>의 영조보다는 오히려 <변호인>의 송우석을 만날 가능성이 높다. 왕과 세자 사이 가족사에 중심을 뒀던 <사도>와 <나랏말싸미>는 소재부터 결이 좀 다르다. 후자의 메시지가 좀 더 사회적이다. 무엇보다 세종대왕과 영조는 둘 다 좋은 왕이라는 평가를 받지만, 우리 역사에 미치는 영향력과 중량감에서도 차이가 난다.

반면 백성과 국가의 앞날을 걱정해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면서까지 큰 그림을 그렸던 세종대왕은, 사건의 부당함 앞에 정의롭게 맞섰던 ‘송변’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또 훈민정음 창제 과정은 일본과 연관 지을 곳이 없어 보여도 이미 그 자체가 민족정신의 뿌리다. 심상찮게 전개되고 있는 반일 운동이 <나랏말싸미>를 살짝 거쳤다가 <봉오동 전투>(원신연)로 옮겨갈 수도 있을 듯하다.

신동욱 / 영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