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구 마린시티 빌딩들. 전민철 기자

누구보다 높이 올라가고자 하는 열망이 내재돼 있기라도 한 걸까요. 건축의 역사를 돌아보면 사람들은 더 높고, 더 거대한 인공물을 짓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끝이 없는 하늘 끝에 닿으려는 듯 말이죠.

건축 기술이 발전하고, 100층 건물쯤은 마음만 먹으면 뚝딱 지을 수 있게 되자 경쟁이라도 하듯 빌딩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타워’ ‘시티’ 등의 이름이 붙은 거대한 콘크리트 건축물이 하나둘 들어섰죠.

그리고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맞닥뜨립니다. 거대한 마천루는 신종 재난을 불러일으켰는데요. 바로 ‘빌딩풍’입니다.

해운대구 센텀시티 빌딩들. 전민철 기자

① 스스로 불러온 재앙, 빌딩풍

빌딩풍은 밀집된 고층 건물 사이에서 부는 강한 바람을 뜻합니다. 벌판이나 바다처럼 장애물이 없는 곳을 타고 밀려오던 바람이 빌딩 숲에 진입하면 갑자기 압력과 세기, 속도가 급증하는데요.

건물이 다닥다닥 붙은 빌딩 숲 사이는 다른 곳보다 기압이 낮아집니다. 낮은 기압은 공기의 속도를 높이고요. 호스의 노즐 부위를 손가락으로 꾹 눌러 구멍을 좁히면 물이 더 멀리, 더 강하게 뿜어져 나오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빌딩풍은 자연적으로 부는 바람의 세기를 2, 3배 키웁니다. 빌딩풍 피해는 이미 몇 년 전부터 현실이 됐는데요. ‘마천루의 도시’ 부산은 매년 빌딩풍 피해가 발생합니다.

빌딩풍 문제는 2018년 태풍 ‘콩레이’ 때 공사 중이던 부산 해운대구 엘시티 외벽 유리창이 파손되고 파편이 인근 상가로 쏟아지는 피해가 생기면서 본격화했습니다. 이후 매년 빌딩풍으로 크고 작은 피해가 반복됐죠.

2019년 태풍 ‘타파’로 벡스코 천장 곳곳이 부서지고 외부 마감재가 파손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벡스코는 고층 빌딩이 밀집한 해운대구 센텀시티에 있어 빌딩풍의 영향을 크게 받습니다.

빌딩풍은 태풍이 가진 위력을 키우기도 합니다. 2020년 태풍 ‘마이삭’이 불었을 때 해운대 앞바다 풍속은 23.4㎧였지만, 고층 빌딩이 밀집한 마린시티는 최대 36㎧, 엘시티 주변은 47.6㎧로 측정됐습니다.

2022년 태풍 ‘힌남노’ 때는 엘시티 주변 풍속이 80㎧를 찍기도 했고요. 마린시티와 그 주변에서도 41㎧의 강풍이 계속됐습니다.

2023년 태풍 ‘카눈’이 부산을 강타한 당시 엘시티 일대는 순간풍속이 39㎧, 마린시티 일대는 32㎧의 강풍이 불었습니다. 같은 해 해운대에서는 빌딩풍으로 고층 아파트 유리창이 떨어져 하마터면 큰 사고로 이어질 뻔했죠.

해운대구 엘시티 전경. 국제신문DB

② 예상치 못한 죽음

빌딩풍은 태풍이 몰아칠 때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닙니다. 맑은 날에도 때아닌 돌풍이 휘몰아쳐 길 가던 행인이 쓰러지는 사고도 있었고요. 해풍을 머금은 빌딩풍이 불어닥치는 바람에 나무가 고사하기도 했습니다.

엘시티 일대 소공원의 수목이 대거 고사한 일이 있었는데요. 3곳의 소공원에는 교목(큰 나무) 250그루, 관목(작은 나무) 2만 그루가량이 심겼습니다. 그런데 최근 2년간 교목 50그루와 관목 일부가 고사해버렸는데요.

많은 나무가 고사하자 구는 점검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지난달 28일 소공원 3곳의 수목 상태 조사 결과가 나왔죠. 고사의 원인은 해풍으로 확인됐습니다. 해안에 있는 만큼 해풍이 강하게 불고, 염분을 머금은 바람이 나무의 가지와 토용 등에 스며들면서 생육 상태가 불량해진 것.

특히 빌딩풍도 주요 원인으로 조사됐는데요. 빌딩풍 역시 해풍의 하나로, 강한 바람이 계속 불면서 수목이 이를 견디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전국 고층 건축물 상위 20위 가운데 13개, 50층 이상 아파트나 주상복합건물의 40%가 부산에 몰려 있습니다. 한동안 해운대구에 집중됐으나 이제는 서구 송도해수욕장, 북항 재개발 지역 등 해안가를 중심으로 점점 확산하는 추세입니다.

빌딩풍 피해가 재난 수준에 이른 지금, 자꾸 건축물만 지어 올릴 때가 아닙니다. 정부와 지자체는 빌딩풍 가이드라인을 조속히 마련해야 합니다. 기존 건축물에 대해서도 빌딩풍 저감책을 적용해야 하죠.